왜 듣지 않는가?
(Why Wont They Listen?)
차 례
제 1 장 걱정되는 경향
제 2 장 복음이란 무엇인가?
제 3 장 교통(의사 소통, communication)
이것이 문제다
제 4 장 십자가 장애물!
제 5 장 십자가 미련한 것!
제 6 장 개척적인 전도(Pioneer
Evangelism) 위대한 성공!
제 7 장 유대인에서 헬라인으로
제 8 장 진화론과의 연관
제 9 장 아름다움과 저주
제 10 장 7 개의 C
제 11 장 실용적인 창조론
전도
제 12 장 세대 간의 간격
제 13 장 요점을 신화화 하기(Myth-ing
The Point)
제 14 장 승리의 장 !
구원의
증언, 변화된
삶, 그리고 개인적으로
충격 받는 이야기.
창조론 전도의 결과:
제 1 장 걱정되는 경향
1975년에 나는 호주에 있는
한 공립 학교에서 생물학과
일반과학을 가르치는 교사였다.
그 당시 나이가 든 교사
중 몇 분은 학생들을 다루기가
몇 년 전과 같지 않다고 불평을
하는 것을 자주 들었다.
그 당시 중, 고등학교에
다니는 젊은이들은, 지금은 장년이 된 지난
세대의 젊은이들이 선생님들에게
보여준 것과 같은 존경과
예의는 갖고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누구도
이 문제를 분명하게 지적하기는커녕
오히려 젊은 학생들의 행동이
문화의 전반적인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는 주장에
모두가 동의하는 듯 하였다.
그 당시에는 다수의 목사님들이
공립 학교 학생들에게 정기적으로
종교 교육을 시키고 있었다.
나는 젊었고, 경험이
일천한 교사였다. 그러나 나는 크리스천
교육자로서,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가지고 학생들에게
나의 손을 내밀고 싶은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몇 분의 목사님이
내게로 다가와서 하시는
말씀이, 학교에서
종교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이었다.
또한 날이 갈수록 학생들의
행동이 불손해지고, 학생들이 목사님의 가르침에
전연 흥미를 갖지 않기 때문에
점점 좌절감이 커진다고
하였다.
나는 그들이 마음에 품고
있던 것을 말하면서 쏟아
놓는 내용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그들이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교과과정의
특성을 나에게 설명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목사님들은
바울의 선교여행, 예수님의 복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새로운 땅과 하늘 그리고
신약 성경에 관한 여러 가지를
가르친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많은 학생들은
성경 공부에 대해서 공공연하게
경멸적으로 얘기하고 전혀
흥미를 나타내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목사님들이
원하는 것은 젊은 학생들이
성경을 믿고(believe), 이해하고
그래서 하나님에게 의지하는(trust)
것이었다. 이 목사님들은
어떻게 학생들에게 다가갔는가?
좀 더 나이 드시고,
경험이 많은 목사님
한 분이 지금의 학생들은
몇 년 전의 학생들과는 매우
다르다라고 논평하였다.
그의 논평에 의하면
이러한 경향이 요즈음 들어
점점 심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왜 학생 세대들과 교통(의사소통, communication) 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는가?
목사님들은 이 딜레마를
해결할 방법이 무엇인지를
나에게 물어왔다. 그 딜레마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나는 더 심한 딜레마에
빠지는 것 같았다. 나는 생물학과 일반과학
교과서에 진화론적인 철학이
침투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미생물이 사람으로(microbe-to-man)
되었다는 진화론이
사실인 것처럼 기술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단지 과학 교과서에서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진화론적인 개념이
모든 교과목에 스며들어
있었다.
나는 목사님들에게 말했다.
당신들은 학생들이 대부분의
교과 공부 시간에 무엇을
배우는지 알고 있습니까?
학생들은 그들이 수
백 만년 전 태고의 수프(primeval
soup)로부터 진화된 한낱 동물에
불과하다고 배우고 있습니다.
이들 젊은이들은 진화론이
과학이라고 믿도록
교육 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실재적인 과학이
만들어낸 놀랄만한 기술로
가득찬 세상에서 자라고
있기 때문에 과학이라고
불리는 것들에 대해 매우
존경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진화론이 과학이 아니라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편,
목사님들이 학생들에게
성경을 교육하는 방법은
너무 고루하기 때문에 학생들은
성경이 아주 오래된 종교적인
책에 불과하다는 암시를
받고 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성경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천문학에서 어떻게 태양계가
수 백 만년 동안에 먼지 구름으로부터
스스로 형성되었는지를
배웁니다. 지질학에서는
지구의 나이가 수 십억 년이며
화석 기록은 생명이 진화한
역사라고 배웁니다. 생물학에서는 그들에게
원숭이 사람(ape-man)의 그림을 보여주면서
이들이 학생들의 조상이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역사에서는 원시인이
석기시대를 지나 진화론적인
과정에 따라 진화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목사님들에게
대부분의 교과목들은 학생들에게
성경이 인류의 기원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게 하는 진화론적인
내용을 교육하고 있다는
사실을 수시로 설명하였다.
선생님들이 특별하게
성경이라 지칭하지는 않지만,
중요한 사항은 학생들이
성경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는
생각을 하도록 교육하는
환경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나는 내 학생
중 하나가 다음과 같이
불쑥 질문 한 것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선생님, 성경에서
우리의 조상이 아담과 이브라고
할 때 어떻게 그것을 믿습니까?
- 그리고 우리는 과학을
통하여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목사님들에게
해 드리고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학생들이
학교를 다닐 동안에는 점점
더 진화론이 사실이고,
과학은 성경이 틀린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배웁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했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교과서는
우주와 생명이 우연하게
이루어지는 무작위적인
과정(확률적인 과정,
random process)에 의해서 생겨났다고
학생들에게 말합니다.
학생들은 진화론과
원숭이 사람(ape-men)에 대한 가르침이 아담과
하와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과
모순이 된다는 것을 압니다.
이제 더 많은 선생님들이
성경을 공격하는데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이런 학생들이
여러분들의 종교 교육 클래스에
들어와서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 귀를 기울일 것 같습니까?
그들 중 많은 숫자의
학생들이 목사님들조차
성경을 믿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늘날과 같은 과학시대에
비해 성경은 너무 시대에
뒤떨어진, 오래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그들은 당신들이
무엇을 말하든지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입니다.
목사님들은 이전에는
한번도 이러한 사항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것은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나는
목사님들이 바울의 선교여행이나
예수님이 생애, 복음의
능력과 같은 사실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기 전에 학생들의
주의를 끌어서 성경은 진정
믿을 수 있다는 사실과 성경은
오류가 전연 없는 확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인식하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나는 그들이 반-기독교적(anti-Christian)인
가르침을 반박하는 일련의
수업을 개발하여 매일 매일
그 수업을 학생들에게 제공할
것을 제안하였다. 우리들은 교과서를 살펴보고
잘못을 지적하여 비판할
수 있다-그러나 동시에
교과서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성경이 증거 한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설명하여야
한다.
나는 목사님들이
학생들에게 성경 공부를
시킬 때, 창세기의 내용을 옹호하고,
주장하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성경의 첫번째 책인
창세기가 학생들의 눈으로
보아 진실이 아니라고 여겨진다면,
어떻게 이들이 성경의
다른 책들은 진실이라고
믿겠는가? 이런 일이
있은 지 20년 후에 어떤
여자 성도님이 나에게 한
말이 기억 난다. 내가
진화론을 받아들여야 하며
창세기는 성경에 기술된
대로 믿을 수 없다고 교회가
나에게 말했을 때, 나는 그러면 하나님은 언제부터
진실을 말하기 시작했나요라고 반문하였다.
나는 학생들과
많은 대화와 교제를 하면서
학생들의 변화된 생각을
확인하였다. 만약 종교 교육 시간에
그들이 신약 성경의 내용을
믿으라고 설교를 들은 후
과학시간에 성경의 첫 책인
창세기에 기록된 내용이
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그들이
신약 성경의 내용을 기록된
대로 믿을 수 있겠는가?
목사님들과
나는 학생들에게 진화론이
단지 하나의 믿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는
연속 강좌를 고안하였다 원숭이 사람(猿人,
ape-men)은 없었다, 진화론자들은
지구의 나이가 수 십억년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했다,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태양계의 기원에
대한 이론은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등 등.
목사님들은 이러한 강좌를
진행하면서 매우 놀라게
되었다. 학생들이
바로 앉아서 듣는 것이었다.
그들은 매우 흥미로워
했으며 여러 가지 질문을
쏟아내는 것이었다-탄소 동위원소를 이용한
나이 측정이 무엇인가?
공룡은 언제 존재했는가?
왜 우리들의 선생님들은
우리에게 이런 정보를 말해
주지 않는가?
실제로 과학은 성경이
옳지 않다라고 증명하지
못했으며, 우리들
주위의 세계를 설명하는데
성경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목사님들이 학생들에게
분명하게 예시해 주었더니,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많은 학생들이
영적인 것에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었다. 그 후에
목사님들이 신약 성경의
예수님에 대해서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 학생들이
듣고, 기록까지 하게
되는 성공을 거둘 수가 있었다.
그 당시에는 내가 나중에
명명한 창조론 전도라는 새로운 전도방법을
개발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이 전도방법은
성경에 기초를 두고 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이
오늘날의 세계 구석구석에
이르게 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중의 하나이다.
내가 일본의 지방을 다니면서
강연할 때 목사님과 학생들
사이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첫번째 강연을 위하여
일본어 통역자로 나단 이라는
청년을 만나게 되어 매우
기뻤다. 그는 일본에서
태어났고 일본의 문화 속에서
자랐으며 미국 선교사의
아들이었다.
나는 나단의 아버지를
어느 강연장에서 만났다.
나단의 아버지가 나에게
한 말에 의하면 그와 그의
아내는 미국 선교사로서
일본 문화와 효과적으로
교통(의사 소통,
communication)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일본에서
낳은 그들의 아들, 나단을 일본 사람들에게
드리는 선물로 결정하였다고
하였다.
나단은 일본 문화 속에서
성장하였기 때문에 일본어를
실수 없이 잘 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 사람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실제로 그는 통역자로서
삶을 꾸려가고 있다.
나단이 처음 나에게 설명한
것은 내가 하나님이란 단어를 사용할 때마다
그는 이 단어를 단지 신으로 통역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일본에는 신도교(神道敎,
Shinto religion)가 널리 유행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많은
신들에 대해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내가 이야기 하는
신(=하나님)도
그들의 많은 신 중에 더해지는
하나의 신으로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God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마다
나단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세상을 유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단은 내가 생각하지
못한 것과도 연결시켰다.
2차 세계 대전이 있기까지,
일본에서는 크리스천들이
처벌되었고 죽임을 당했다.
일본문화는 기독교적
배경을 전연 가지고 있지
않았다. 1억5천만
인구 가운데서 0.1%보다
적은 인구가 중생한 크리스천으로
여겨지고 있다. 만약
내가 일반 일본인들에게
그들이 죄인이고 그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이야기 했다면 그들은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전연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당신이 사람들에게
그들이 죄인이라고 말할
때, 죄가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은, 당신의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
창세기에 기록된 인류의
타락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이
없이,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류의 조상인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인류 기원에 대한 이해가
없이 어떻게 그들이 복음을
이해하겠는가? 당신이
그들에게 죄인이라고 말할
수는 있으나 그들이 죄가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복음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나단이 나에게 충고한
것은 내가 일반 일본인들에게
복음의 메시지를 전할 때는
그들이 복음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것을 돕기 위하여
먼저 창세기를 이야기하여
복음에 대한 기초를 놓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일본 교육계에서는 무신론적
진화론이 사실인 것처럼
학생들에게 가르쳐지고
있다고 말했다. 아마도
일본 국민들 대부분은 진화에
대해서는 들어보았겠지만
성경이 믿을 만 하다는
말을 들은 사람은 얼마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진화론은 기원에
대한 과학적인 견해로 여겨지기
때문에 사실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실제적인 인간
구속(속죄, salvation) 계획의 뿌리인
인류 기원에 대한 성경의
명확한 설명을 듣기 전에
사람들이 진화론에 대해서
듣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
그리고 또 다른 문제가
있다. 교육 시스템과
미국 같은 나라의 타협적인
선교의 영향 때문에 일본의
작은 보수적인 교회의 많은
크리스천들이 진화론 혹은
진화론적인 철학의 관점을
믿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아담의 창조와
인류의 최초의 타락을 성경에
기술된 대로 믿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이
일본에서 교회가 그들의
문화에 충분히 접근하지
못한 부분적인 이유가 아닐까?
이런, 저런 이유(예를 들면, 비용(cost))로, 선교사들이
일본에서 철수하였다.
그래서 심지어는 일본을
선교의 묘지로 부르고
있다.
세계적으로 많은 교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을 빠뜨리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 중요한
기술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문화 안에서도, 기독교적인 기반이 전혀
없는 문화 안에서도 매우
유익한 기술이다.
이것은 창조론적
전도로 불리 운다.
만약 교회가 이것을 이해하고
오늘날 같은 매우 회의적인(skeptical)
세상에 이것을 사용하기만
하면 전 민족을 변화시킬
수도 있는 매우 성공적인
전도 방법이 될 것이다.
이전에 기독교 국가였던
서구의 많은 나라들이 세속화
되었을 뿐만 아니라 반 기독교적인(anti-Christian)
요소가 크게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주요한 기독교적
영향을 받지 못한 나라들은
복음에 대하여 문을 닫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이들에게 접근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 것인가?
여기에 해답이 있다.
설득력 있는 강력한
해답!
간증
수 년 전, 당신의
사역은 나를 성경의 하나님과
구속 주 앞으로 인도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내가 처음 하나님을
믿으려고 했을 때 나는 그의
존재를 인정하여야 했습니다.
내가 성경의 하나님을
믿으려고 했을 때 성경이
오류가 없다는 것이 나에게
증명이 되어야 했습니다.
당신의 진화 대 창조에
대한 자료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에 기술된 대로 진실이라는
것을 나에게 증언해 주었습니다.
V. B., 뉴욕
제 2 장 복음이란 무엇인가?
보통의 크리스천은 이
질문에 분명하게 다음과
같이 대답을 한다. 복음(gospel)이란 말은
좋은 소식을 의미한다.
크리스천이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기쁜 소식을 나타내는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1-4절에서 말한
것을 보자: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할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15:1-4).
바울의 복음에 대한 그의
설명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12-45절에서 복음의
메시지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주의하여 살펴보자: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 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 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15:12-45).
예수님이 죽으신 이유를
설명하면서 바울은 창세기로
가서 아담과 아담의 타락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유의하라. 다시 말하면,
사람들이 신약의 좋은
소식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세기의 나쁜 소식인
아담의 타락을 이해하고
그것이 죄의 기원이며,
그 죄의 형벌은 사망이라는
것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어느 목사님의 부인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우리 교회는
당신의 세미나에 참여 할
수 없습니다, 라고 부인이
나에게 말했다. 나의 반응은
왜 못 오십니까?, 저
당신은
창세기에 기술된 내용을
역사적인 사실로 주장하고
있으나 창세기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우리가
창세기를 어떻게 믿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
우리는 기독교의 본질적인
문제에 동의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당신이 본질적인 문제라고
하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라고 나는 반문하였다.
그녀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고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이
아닙니까? 창세기에
기록된 대로 믿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계속하여 나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였다.
만약 성경이 정의하는
대로 누군가가 중생하였는데,
당신이 주장하는 대로
창세기에 기록된 대로 믿지
않는다면, 그는 구원
받았습니까? 그리고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나는 대답하였다. 저
만일 그가 진실로
거듭났다면, 그가
창세기에 기술된 대로 믿지
않는다 해도 그는 물론 구원
받았으며 천국에 가겠지요.
그녀는 불쑥 말하였다.
그것 보세요. 창세기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니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일들이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반문하였다:
내가 당신에게 한가지
질문을 해도 되겠습니까? 예, 좋습니다. 그녀는 대답하였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까? 그
여자는 금방 대답하였다.
우리들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지요. 나는 질문을
계속했다. 그러면
당신이 말하는 죄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에 대한 대답은, 반역(rebellion) 이었다.
나는 다시 물었다.
당신이 어떻게 죄를 반역이라고
정의하게 되었는지 나에게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그것은 당신의 생각입니까?
아니면 다른 누구의
생각입니까? 나는
사람들이 죄를 자부심의 부족으로 정의하는 것을 들은
적도 있습니다. 무엇을
기초로 하여 죄를 반역이라고 결정하였습니까?
당신은 어디서 그 정의를
가져왔습니까?
그녀의 응답은? 나는 당신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고 있습니다!라고 그녀는 선언하였다.
그녀는 내가 그녀를
박스에 가두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녀는 창세기 없이는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는
것을 수긍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죄의 의미는
죄의 기원(origin)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창세기에
나와 있는 아담의 타락을
문자적으로 받아 들이지
않고는 죄를 정의할 수 없다.
창세기에 기록된 대로
아담의 반역은 죄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기초이다.
내가 시도한 것이 무엇이었겠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단순한
것이다.: 우리가 죄를 반역으로
정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문자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반역 사건의 존재
여부이다. 우리 모두가
죄인인 이유는, 바울이
분명하게 말했듯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 우리는 첫
사람인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창세기에 기록된
대로 첫 사람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뱀에게 유혹되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바로 타락이며
이것이 반역이다.
크리스천으로서 이 질문에
명확하게 대답할 필요가
있다: 문자적인 타락을
믿는 것이 본질적인 문제인가?
절대적인가? 만약
성경 창세기에 기록된 문자적인
타락이 없었다면 무엇이
죄인가? 누가 죄를
정의하나? 그러면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혹은 로마서 5장 12절에서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라고 말한 것은 무엇에
대한 것인가?
바울은, 복음을
설명할 때, 창세기에
나오는 복음과 나쁜 소식의
근거를 논의한다: 죄의 기원과 죄의 형벌인
죽음. 바울은 그 다음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의 기쁜 소식을 말한다.
골로새서에서 복음을
설명할 때에도 바울은 우리들의
구세주,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창조주 되심을
분명하게 지적한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서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골1:13-17).
또한 계시록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된 것을 볼 수 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계4:11).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계5:9).
우리들의 창조주가 우리들의
구속주가 되셨다! 이것을 역사적인 사실로
인정해야 하는 이유는 모든
인류가 죄인이기 때문이다.
죄가 있는 사람이 죄를
위하여 죽을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죄를 위하여 죽을 완벽한
사람이 필요하다. 유일한 해결 법은 완벽하고
죄가 없으신 창조주께서
사람이 되어 우리들의 구세주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창조론 교리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바울은 또한 모든 것들의
완성, 즉 타락의 결과를
극복하는 최후의 승리에
대해서 계속 써 내려가고
있다.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다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전15: 46-57).
완성(consummation)에 대하여는
베드로 후서 3장과
요한계시록 21장과
22장에 상세하게 주어져
있다. 우리에게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주어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우는
것이나, 죽음이나
저주(이것은 창세기
3장에 기록된 것과 같이
죄 때문에 부가된 것이다)가 없을 것이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 갔음이러라 (계21:4).
다시 저주가 없으며
(계22: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벧후3:13).
이 모든 것들을 배경으로
하여, 동일한 문화권
내의 다른 사람들이나 타
문화권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복음의 세가지
요소를 이해하는 것이 전제
조건이라는 사실을 주장하고
싶다. 다음을 고려하라:
- 만약 어떤 설교자가 창조주와
죄와 죽음의 기원에 대한
메시지 없이 복음을 설교한다면,
그는 복음의 나머지 부분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기초적인
지식이 없이 설교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초적인
정보가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왜 그는 죽어야
했는가? 왜 다른 사람은
안 되고 그만이 죄를 위하여
죽을 수 있는가? 그리스도에
대한 특별성은 무엇인가?
죄는 어디서 왔는가? 어떻게
우리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왜 우리는 죽는가?라는
물음에 명확한 대답을
할 수가 없다.
- 만약 어떤 설교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과 죽음에서
살아나신 메시지 없이
복음을 설교한다면 그는
능력이 없는 복음을 설교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바울이
말한 바와 같다-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고전15:17). 우리들
개개인의 죄가 용서 받을
수 있고 그리고 우리 창조주와의
관계가 회복되어지는
유일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하신
일 때문이다. 복음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다.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 운동의 메시지가 매우
파괴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그룹의 리더격인
마커스 보그는 예수님의
처녀 탄생과 부활, 그리고
기독교 신앙의 타협할
수 없는 많은 사항들을
부인한다. 그는 자기 자신을
크리스천이라고 말하고
많은 교회에서 그를 받아
들이고 있지만, 성경에
의하면, 그의 믿음은 가짜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예수
세미나 운동의 리더인
마커스 보그는 가끔 창세기를
신화의 영역에 놓고 강연을
시작한다.
우리는 죄가 이 세상에
침입하였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
- 새로운 땅과 새로운 하늘의
메시지가 없이 설교하여지는
복음은 희망이 없는 메시지이다.
죄인인 우리에게 죄없는
상태를 가져 다 주는 미래가
없는 복음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죄와
저주의 심판 때문에 피조물이
신음(groaning)하고 있다(롬8:22).
우리들 주위에는 죽음,
질병, 고난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이 우리들
세계에 쳐들어 왔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고린도전서 15장
26절에 보면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그렇다면 사망은 미래
어느 때에 멸망될 적이다.
베드로는 우리가 그
미래의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벧후3:13).
우리는 이 미래의 상태가
어떠한 곳인지에 대해서
요한 계시록을 통해 살짝
살펴 볼 수 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21:1).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4).
다시 저주가 없으며(계22:3).
우리는 우리가 죽음,
고통, 병고, 질고로부터 자유로워
질 때를 얼마나 고대하고
있는가! 나의 동료이자
친구인 게리 파커 박사는 우리가 실제적으로
완전하게 회복을 받게 되는
것은 죽을 때이다.라고 말한다.
그림에 보이는 세가지
요소는 본질적으로 복음을
이해하고, 그래서
기독교의 궁극적인 의미를
완전하게 이해하는데 필요한
것이다.
여기서 잠간 제1장에서 논의한 것을 기억해
보라. 학생들은 복음의
능력과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 흥미를 나타내지 않았던
사실을 기억하는가? 그 이유는 학교에서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첫 사람인
아담을 지으셨는데 그가
반역하여서 그 후손인 우리가
죄인이 되었고 죽음의 저주를
받게 되었다는 복음의
근거(foundation)가 거짓이라고
학생들에게 가르치기 때문이었다.
이 학생들은 1970년대의
학교 시스템의 틀 안에서
교육을 받았다. 새
천년이 시작되면서 교과서는
더욱더 심하게 반 기독교(anti
Christian)적인 색채를 띄고
있다. 대체로 학생들은
그들이 단지 동물이라고
배우며 인생에는 목적과
의미가 없다라고 배운다.
그리고 우주와 인생을
설명하는데 하나님은 아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과학이
증명하였다고 가르친다.
그들에게는 일상생활에서
부딪치는 고통과 죽음과
고난은, 진화론적인
믿음이 가르치는 것과 같이,
생활의 한 부분으로
필연적인 것이며 이 지구상에서
인생의 과정을 진행시키는
중요한 요소라고 말한다.
이런 가르침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나타나겠는가? 젊은이들이 고통 당하고
있으나 왜 이런 일이 자기들에게
일어나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요즈음의 젊은이들은
죄의 의미와 죄의 결과
(사망과 고통은 죄의
결과로 세상에 침입하여
온 것임을 기억하라)에 대해서 이해를 하지
못한다. 그들은 그들이
동물에서 진화된 존재라는
것을 가르치는 문화 속에서
성장하였다. 또한
그들은 그들이 믿을 수 있는
창조주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문화 속에서 성장하였다.
그래서 논리적으로
절대적인 것에 대한 기초가
없는 것이다(물론
그들에게는 절대적인 것이
없다는 것이 그들의 절대이다). 그들의 일반적인 견해는
다음과 같다: 모든
사람이 그들 자신의 생각을
가질 권리가 있다. 모든 견해(관점)에는 서로를 인정하는
허용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님만이 진리라고 하며 배타적이기
때문에 이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진리는 상대적인 것이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영화에서는 혼외 정사나
불필요한 폭력, 물질주의,
감각적인 쾌락을 인정된 표준으로
묘사한다. 인간의
일생이 실제적으로 특별하게
고려되지 않고 있다.
만약 1970년대의 학생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이해할 수 있는 기본적인
지식을 잃어버렸다면,
오늘날 세속적으로
기울어져 있는 교육시스템,
대중매체, 사회의
영향이 뒤섞여져 있는 서구
국가들은 더 큰 문제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기독교 기반이
전연 없는 일본 같은 나라에서,창조주, 죄, 그리고 죄를 대속 받아야
한다는 필요성에 대한 기초적
지식이 없이 어떻게 복음을
이해 할 수 있겠는가?
비신자들에게 (일부분의
신자들을 포함시킬 수 있음:
역자 주) 창세기에
포함되어 있는 복음의 기초적인
관점을 이해 시키는 것은
그들을 그리스도의 세계에
들어오게 하는 강력한 전도의
문을 여는 극히 중요한 열쇠이다.
간증
나는 비록 나이가 어렸지만
이미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그런데 창조론이 나의
회심(전환)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당신은
탁월하게 창조론을 성경의
다른 부분 연결시켰고 또한
사회적인 이슈와 연결시켰습니다.
당신은 죄와 사망에
대해서 내가 너무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
나는 당신이 강연할 때
언급한 어떤 숙녀와 같았습니다.
그 숙녀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면서요. 크리스천이
되는 것은 반쯤 상영된 영화를
보기 시작하는 것과 같다.
당신은 나에게 영화의
시작을 보여 주었다; 이제 나는 영화의 전체적인
계획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진실하게 나의 크리스천
생활을 시작하게 해준 당신에게
감사 드립니다. 또한
특별히 나와 같이 경건한
양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오직 창세기를 기록된 대로
이해하고 믿음으로서 성경의
나머지 부분을 이해하도록
도와준 당신에게 감사 드립니다.
G.D.,
영국
제 3 장 교통(의사 소통, communication)
이것이 문제다
어떻게 복음이 1세기에 그렇게 괄목할
만하게 전파가 되었는가?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독교 리더,
전도자, 성경 공부
교사들을 포함한 크리스천들은
그들이 새로운 청중들을
만나게 될 때 초대 크리스천들이
사용한 방법론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는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이
예수님이 주신 위대한 위임
명령을 수행하는 과정(행위)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사도행전에는 설교자의
예, 교사의 예, 선교자의 예가 포함되어
있어서 현대의 설교자,
교사, 선교자들이
복음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일을 잘 감당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런데 이들 초대 크리스천들이
복음을 표현할 때 사용한
방법론에 대해서 우리가
가끔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청중에게
설교와 증언을 할 때 그들은
청중들이 알고 있는 기독교
신앙의 수준에 맞추어서
시작하였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공통분모에서 시작하였다
모두가 이해하고 있는
공통 수준에서 교통(의사 소통, communication)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어느 특수한 문화의
배경과 관련된 수준에서
시작하여, 거기서
곧바로 그들의 가슴과 마음을
그리스도로 직접 닿게 만든다.
나는 오늘날과 같은 세계에서
복음을 전도할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여야 할 사항은 대화(교통)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한 비유를 들어보기로
하자.
한 선교사가 나에게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대학에서 선교 지의 언어와
문화를 배웠는데도 불구하고,
막상 현지 문화 속에서
생활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 할 때에는, 상호간의
교통(의사 소통,
communication)문제로 상당한 어려움을
경험하였다.
예를 들면, 북 호주
이리안 쟈야 지방의 검은
피부를 가진 종족에게 말씀을
전할 때였다. 선교사가
현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죄의 검은 점들을 씻어
주어 죄인인 그들을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고, 희고, 정결하게
만든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현지인들은 그
말을 듣고 몹시 당황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피가 사람들을
더럽게 하는 이유를 알고
싶어했다. 그 선교사는
의사 전달 문제에 봉착한
것이었다. 그가 마침내
그 문제를 파악하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그들은 검은 피부에 대한
문화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선교사가 말하는 것을
완전히 다르게 이해한 것이었다.
그들이 불을 피울 때
그들의 피부에 흰 재가 날아와
앉을 때 그들은 더러워졌다고
생각한다. 흰 것인데도!
그래서 선교사가 예수님의
피가 그들의 영혼을 희게
만든다고 말했을 때 그들은
예수님의 피가 그들을 더럽게
한다고 이해한 것이다.
이 선교사가 나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누군가가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웠다고 해서 그
문화와 아무 어려움이 없이
교통(교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다른 문화의 언어는
잘 습득하였으나 그 문화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또한 그 언어가 문화
속에서 어떻게 활용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문화 속에서 교통(의사 소통, communication)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선교사들이 경험한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너무나
많이 있다. 이들 이야기들이
서로 연관이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실소를 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우리 모두에게 흥미를 끄는
선교사들의 생생한 경험에
내포된 근본적인 메시지가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데
얼마나 중요한지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또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사람들이 동일한
언어를 사용할 지라도 다른
문화권으로부터 온 언어는
철자는 같은 단어이지만
매우 다른 뜻을 갖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호주 인으로 미국에서
다년간 살면서 다음과 같은
경험을 하였다.
몇 년 전 내가 아직 호주에
살고 있으면서, 미국에서
강연을 하기위한 여행을
몇 차례 다닌 적이 있었다.
어느날 미국에서 호주에
온 10대 소녀가 브리스베인의
우리집을 방문했다. 그 때 나의 아들 제래미는
젖먹이 아기였다. 나는 그 소녀에게 잘 대해
주려고 노력하였으며,
최대한 환대하였다.
그러던 중 한번은 나는
그 소녀에게 나의 아들을
좀 돌보아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 때 그녀의 얼굴에 나타난
무서운 표정을 누가 보았다면
내가 그녀에게 심한 모욕을
주었던지 혹은 매우 무시무시한
것을 말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녀는 어떻게 대답할까 매우 당황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녀에게 말했다.
별 문제 없어요. 내가 곧 그 아이를 돌볼테니까요. 그러나 그녀는 매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얼굴 표정이 글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다.
그때 나는 우리들의 의사
전달에 매우 큰 간극(gap)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때 갑자기 그전에
미국을 방문했을 때 겪었던
일이 기억 났다. 그제서야
나는 그 소녀에게 무엇이
일어난 지 알아 차렸다.
호주에서는, nursing
the baby라고 하면 단지 어린아이를
붙드는(꼭 껴안는)
것이다. 미국에서
nursing
a baby라고 하면 엄마가 아이에게
젖 먹이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그 소녀에게 그
소녀의 젖을 아기에게 먹이라고
요청한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내가 나의 젖을 아기에게
먹이겠다고까지 했으니!
나는 그 소녀가 호주
남자들은 진화론적인 돌연변이를
통하여 어린이에게 젖을
먹이도록 변화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면서 놀라지 않았나
생각하였다.
이와 같이 같은 언어로
같은 말을 할지라도 다른
문화 속에서 사용되면 전연
다른 뜻을 가지게 된다.
내가 이것을 미국에서
열린 어떤 세미나에서 이야기
했더니 어떤 여자가 나에게
질문 하였다, 그러면
호주에서는 어린아이에게
모유로 직접 젖을 먹이는
것(breast-feed)을 어떻게 말
합니까?
나의 대답은? 저
호주에서도 역시
모유로 키우다(breast-feed)라고 말합니다. 당신들도 그렇게 말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요? 이것은 미국 문화권의
사람들이 이해할 필요가
있는 호주문화의 다른 한
측면이다. 일반 호주
인들은 얼마간은 퉁명스러우며
그저 그것과 같이(like
it is)라고 말한다. (나는
이 말 버릇때문에 미국에서
곤경에 빠진 적이 몇 번 있었다.)
이제 나는 미국에서 수 년 동안 살았으니
한 호주 인이 미국 문화에
접하여 교통하면서 겪은
문제들을 책으로 쓸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미국에서 태어난 나의
가까운 친구인 카알은 일본
여성과 결혼하였다. 어느날 카알과 나는 그의
아내 앞에서 농담을 주고
받고 있었다. 우리들은
이 농담이 매우 유쾌한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카알의 아내는 그 농담을
듣고도 전연 웃지 않았다.
그녀는 우리에게 말했다.
나는 전연 우습지 않는데요. 그래서 우리는 그녀에게
그 농담에 숨은 내용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왜 당신이 그것을
그렇게 재미있다고 생각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겠습니다.
내가 세상의 다른 지역을
여행하면서 그리고 다른
문화를 경험하면서, 다른 문화의 사람들과
교통(의사 소통,
communication)하기 전에 그 사람들의
사고 방식을 먼저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
나는 선교사로부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이 문화권에서는 이런
말은 하지 말라. 그것은
완전히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혹은, 그들의 생각은
당신의 문화권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에 그들은 그
독특한 사항을 이해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은 웃을 수 있으나
이전에 일본에서 강연한
후, 일본인 통역자가
나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을 때 매우 당황하였다:
일본 사람들이 당신이
하는 농담에 어떻게 가슴을
치면서 웃었는지를 기억하십니까? 예라고 나는 대답하였다.
통역자의 다음과 같은
말은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였다: 나는 당신에게
이 말을 꼭 해야겠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실제로
그들은 당신의 농담을 전연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당신의 농담을
그렇게 우습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내가 함(Ham) 선생이
농담을 이야기 하니까 예의
바르게 웃어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이
잘 알아 차리지 못하는 또
다른 교통(의사 소통,
communication)의 문제가 있다.
동일한 문화권내에서도
매우 큰 교통(의사
소통, communication)의 간극이
있을 수 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은 세대간 격차이다.
나는 서구 문화권에서도
이 세대간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더욱 명료해
질 것이다. 나는 지금
여기서는 다음의 내용만
언급 하겠다. 점점
세속화 되어가는 문화 속에서
비 크리스천 세대가 증가하면
할수록 크리스천들은 이들과
효과적으로 의사를 전달하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본질적으로는 다른 문화권의
사람과 교통(의사
소통, communication)하는 것과
같다. 이들에게는
동일한 말이 다른 뜻을 갖거나
전연 의미가 없이 들릴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많은
기독교 교파들은 젊은 세대들과는
전연 관계없는 구절이나
은어를 사용한다. 설교나 찬송가는 피로 씻음 받는다든지 혹은 요단 강을
건너다라는 구절을
사용하는데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연 모른다. 전통적인
기독교가 자기들 만의 용어들로
완성된 다른 문화권을 형성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음 두 장에서는 많은
크리스천들을 놀라게 할,
사도행전에서 제시된
2가지 특수한 설교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한
관점으로 이 2가지
설교를 조사해보면 타 문화권에서는
어떻게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가에 대한 노하우 뿐만
아니라 점점 반하나님(anti-God)화 되어가는
서구 문화(나라)에서 어떻게 설교 하는가에
대한 명확한 예가 주어진다.
간증
2년 전, 나와 나의
가장 친한 친구는 캔 함과
캐리 파커가 함께 제작한
비디오-창세기 이해를 시청한 후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때
우리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그 비디오를 보면서 우리들이
회심하리라 |